====== 불멸의 산책 ====== | 평점 | ★★★★ | | 한줄평 | 산티아고 순례를 하지 않은 사람보다 한번이라도 해본 사람에게 일독을 권한다 | {{:book:520.jpg?nolink |}}프랑스인으로서 아프리카 대사로서 근무를 하고 작가로서도 명성을 얻은 저자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나서 쓴 글이다. 이 길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 걷는 동안에도 기록하지 않고, 심지어 다녀와서도 이에 대한 글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출판사 지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출간 권유를 받게 되었고 그 결과물이 이 책이다. 출간된 게 2013년이니, 저자가 걸었을 당시는 1~2 년 전으로 예상된다. 걷기, 특히 운동과는 별다른 흥미가 없었던 저자는, 으례 그렇듯 초반엔 어려움을 겪는다. 시간이 지나고 적응을 하면서 보고 느끼고 생각한 내용을 기술했다.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했던 순례와 비교하게 되었는데. - 많이 가는 프랑스 길 대신 카미노 북쪽길을 걸었다. - 도미토리의 알베르게에는 거의 머물지 않고, 텐트를 가지고 다니며 야영을 하거나, 호스텔의 1인실에 묵었다. 저자는 순례자들로 붐비는 루트(프랑스길)를 피해 북쪽길을 걸었고, 때때로 사람들을 피하기위해 지름길을 이용했다(길을 잃어 고생도 했지만). 이 책은 순례를 한번도 하지 않은 사람보다, 한번이라도 했던 사람에게 적합하다. 가장 큰 이유는 다녀온 사람으로서 너무나도 공감 가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온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두가지다. '왜 산티아고 순례를 하게 되었는가?' '다녀온 뒤에 뭘 느끼고 얻었는가?' 나도 한때 누구나 들으면 고개를 끄덕일만한 '멋진 답'을 내놓으려 고민했던 적이 있다(저자도 역시 고백한다). 하지만, 남들이 기대하고 좋아할만한 대답보다는 내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은, '뭐라 표현하기 어렵다는 것' 이다. 좋긴 좋은데, 어떤 느낌인지는 아는데, 이걸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저자도 역시 고백한다). 만일 누군가 이걸 100% 에 가깝게 전달했다고 해도, 상대방에 제대로 이해되고 느껴질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좋긴 좋은데, 뭐라 설명할 길이 없네' 분명한 것은 순례자 스스로가 느끼기 위해서 걷는 것이지, 이걸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기 위해 가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점차 상업화되는 카미노와 이를 이용하는 순례자들에 대한 저자의 거부감이 곳곳에 묻어난다. 나 역시 공감하는 바이지만, 어쩌겠는가? 그럼에도불구하고 저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또다시 까미노를 찾을 것이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나오지만, 이런 문장이 떠올랐다. '한번도 걷지 않은 사람은 있을 수 있어도, 한번만 걸은 사람은 없다' ===== 기억에 남는 구절 ===== "왜 산티아고에 갔나요?" 라는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받았을 때 대답하기가 무척 난처했다. "생각을 좀 하고 싶었어요." 이것은 가장 많이들 예상하는 대답이고, 일반적으로 '좋은' 대답으로 간주된다. 그렇지만 그 대답은 자명하지 않다. 깊이 생각하기 위해서라면 집에 틀어박혀 침대나 소파에서 뒹굴 수도 있고, 부득이한 경우 가깝고 친숙한 코스로 몇 걸음 움직이는 것도 가능하며 심지어 그쪽이 더 낫지 않은가? 카미노가 거기에 뛰어들게 된 이유를 잊게 하는 위력을 가졌다거나 한 것은 아니더라도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된다. 카미노는 그 길을 걷도록 몰아대던 정신적 혼란이나 온갖 잡념들을 걷기의 단순한 명증성으로 대체한다. 길을 떠났고, 그게 전부다.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저 새로운 발견들처럼, 독재적이며 저항 불가능한 산티아고 순례길은 순례를 감행하게끔 한 생각들을 아예 지워버린다. "카미노 북쪽 길! 당연히 북쪽 길로 가야죠. 난 그길을 가봤어요, 그럼요. 하지만 카미노에 두 번째로 갔을 때였어요. 왜냐하면 세상에, 사람들이 그 길로 가지 못하게 금했거든요." "왜죠?" "내게 너무 늙어다고 하더라고요. 끝까지 버티기 힘들 거라고요. 내가 프랑스 길을 먼저 걸었던 건 그 남자 때문이에요. 너무 화가 나더군요. 선생, 원통했어요! 이듬해에 아내한테 말했죠. 이번에는 북쪽 길로 가겠다고요. 그리고 그리로 갔어요." "거기로 가요, 선생! 북쪽 길로 가세요. 그쪽이 제일 아름다워요, 내 말을 믿으세요, 가장 아름답다고요." 스페인에서는 지정 구역 바깥에서 야영하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고, 일몰부터 일출 사이에 야영지를 조성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런 금지 조항을 준수하게 하기는 무척이나 어려울 게 분명하다. 적용 불가능한 법을 위반하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을 주는 일은 없다. 그럼으로써 내가 이 사회보다 더 합리적이라고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스페인인들이 야영하는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관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야영객을 너그럽게 봐주는 정도를 넘어 도와주기까지 했다. 나는 고독에 아주 잘 적응했다. 카미노가 강요하는 방랑과 궁핍이라는 새로운 상태에 적응하려면 고독이 필요해 보이기도 했다. 쌍쌍으로 혹은 몰려다니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이 순례자의 처지를 온전히 경험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학연수를 갈 때 같은 나라 사람들과 함께 가면 원하는 언어를 배워오지 못하는 것처럼, 극단에 이를 정도로 침묵과 반추의 시간을 갖지 않으면, 아무도 가까이 오고 싶지 않을 정도로 때에 찌들지 않으면 순례 여행에 제대로 적응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나는 여행하는 동안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고, 심지어 숙소에서 수첩에 급히 글을 써넣느라 명상에 잠길 소중한 순간들을 놓치는 순례자들을 보면 짜증스럽기까지 했다. 내게 과거는 변덕스럽지만 매력적인 기능, 오직 본인만을 위한 기능, 사람들이 기억이라고 부르는 기능에 맡겨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기억은 그것이 사건에 부여하는 중요도에 따라 선택하고, 버리고, 보존한다. 그 선택은 사람들이 사건 당시에 내리는 판단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에게 특별하고 소중하게 여겨졌던 장면들이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반면, 아무 생각 없이 겪은 별것 아닌 순간들에 감정이 담겨 있어 오래 남아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다시 태어나기도 한다. 나는 뭔가를 놓친 것은 분명했지만 그래도 핵심을 건진 것이었다. 그 핵심이란 바로 그 추억의 장소가 불러일으키는 향수 섞인 시적 정취로, 그것은 민요의 후렴구보다는 고독을 요구했다. 카미노를 걷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엄청나게 많은 생각을 한다. 알고있던 모든 지표는 사라지고, 너무 멀어서 접근이 불가능해 보이는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주변을 둘러싼 공간의 광막함 때문에 마치 자신이 벌거벗은 것처럼 느껴진다. 이 모든 상황은 오직 야외에서만 가능한 독특한 형태의 자기 성찰에 적합하다. 그럴 때 우리는 홀로 자신을 대면한다. 친숙한 것이라고는 생각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생각은 대화를 재현하고 추억을 되살려주며, 우리는 그 속에서 어떤 반가운 존재와 가까워짐을 느낀다. 그렇게 해서 도보 여행자는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을 갑자기 마주치기라도 한 듯 감격스레 자신과 다시 만난다. 낯설고 외지고 인적없고 느리고 단조롭고 끝없이 이어지는 길에 내던져진 그는 자신의 생각이 깊숙한 곳까지 스스로 파고들게 내버려둔다. 추억, 계획, 생각, 모든 것이 감탄스럽고 아름답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혼자 소리 내어 웃고 있음을 깨닫는다. 걷는 일이 마치 크랭크축처럼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걷기는 생각을 자극해 생각을 시작하게 하지만, 거꾸로 생각에서 에너지를 얻기도 한다. 사람들이 생각의 속도에 맞춰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생각이 전속력으로 내달릴 때면 실제로도 거의 달리다시피 걷게 된다. 도보여행자는 그동안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가는 것으로 만족했지만 이제는 진지한 질문들을 체계적으로 다룰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다음날로 결정을 미뤄뒀던 문제들, 충분한 시간을 내어 따져보지 못한 계획들, 한 번도 붙잡고 생각할 용기를 내지 못했던 형이상학적 질문들 등등, 누구나 머릿속에 민감한 주제와 관련된 다양한 질문들을 과도할 정도로 많이 담아두고 살지 않은가. 걸으면서 산만해지지 않기란 지독하게 어렵다는 것을 다들 금방 깨닫는다. 순례자를 위한 표지도 찾아야 하고 자동차도 피해가야 하고 개들도 곁눈으로 지켜보며 조심해야 할뿐더러, 발바닥에서부터 배낭의 하중에 눌리는 허리까지, 해를 받아 뜨거워진 머리통에서부터 배낭의 가죽끈 때문에 떨어져나갈 듯 쑤시는 어깨까지 신체 곳곳에서 보내오는 온갖 경고 신호들이 우리의 주의를 돌려놓는다. 처음에는 꿈을 벗어던졌고, 그다음에는 생각을 벗어던졌고, 이제는 신앙까지도 벗어던졌다. 이 연속적인 허물벗기 후에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깨달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기독교 순례지가 아닌 훨씬 더 큰 것이 될 수도 있고 훨씬 더 작은 것이 될 수도 있다. 그 장소는 고유한 것으로서, 어떤 종교에도 속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거기에 각자가 바라는 모든 것을 갖다 붙일 수 있다. 만일 그곳이 특정 종교와 가까워야 한다면, 그것은 종교들 중에서도 가장 덜 종교적인 종교, 신에 대해서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단지 인간이 자기 존재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허용하는 종교여야 한다. 그렇다면 산티아고는 불교의 순례지다. 내 이야기의 목적은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게 그 여행이 어땠는지 묘사하는 것이다. 산티아고를 향해 출발하면서 나는 아무것도 찾으려 하지 않았으나 그것을 발견했다. 격차는 모든 부분에서 느껴진다. 물론 그 차이가 가장 분명하고도 확실히 나타나는 것은 심리적 차원이다. 순례자는 카미노에 갓 도착한 사람과 시간 개념이 같을 수가 없다. 그는 새로 도착한 사람이 너무 들떠 있고 참을성 없어 보이는 반면 그 자신은 너그럽고 느긋하게 보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상당히 표면적일 뿐이다. 순례자는 다시 이전 생활로 돌아가는 순간 카미노의 이런 효과들이 사라지고 말 것임을 느낀다. 반대로 변화가 더 깊고 지속적인 영역도 있다. 그것은 눈에 잘 띄지 않는 부분인데, 바로 배낭이다. 산티아고에 도착한다는 것은 고대의 시간 속으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갑자기 현대로 아주 돌아와버린다는 의미다. 카미노에서 내게 남은 것은 본질적이고 상당히 막연한 교훈 하나밖에 없었다. 황홀하고 소중하지만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교훈이었다. 나는 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다. 카미노를 걸을 때도, 돌아오고 나서도 나는 아무 글도 쓰지 않았다. 되돌아보는 일 없이, 설사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기록해야 한다는 속박없이 온전히 경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례자들이 숙박지에 도착하기만 하면 열광적으로 글을 쓰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기까지 했다. 그러나 보라, 유난히 매서웠던 그 겨울, 나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지나치는 하얀 풍경 속으로 눈부신 하늘과 진흙투성이 오솔길이, 고독하게 서 있는 에르미타들이, 파도가 몰려드는 해안이 되살아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기억의 감옥에서 깨어난 카미노가 벽을 두드리며 나를 불렀다. 나는 카미노에 대해 생각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한번 실을 잡아당기자 모든 것이 따라나왔다. 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여행이 그저 여행에 불과해서 잊어버릴 수 있다고, 혹은 상자 속에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고 편리한 착각이다. 나는 카미노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것이 정말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줄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생생하게 살아 있고, 지금 내가 그랬던 것처럼 여행 전체를 들려주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다. 물론 그렇다해도 핵심은 빠져있다. 나도 알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머지않아 다시 그길을 걷게 될 것이다. 아마 당신도 그렇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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