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꽃이라고 하는 대학교 시절. 지금 돌이켜보면 못해본 것에 대한 후회가 참 많다. 그 시기에만 할 수 있는게 있는데 말이다. 1학년 2학기에 들어간 동아리가 나의 대학생활을 송두리채 바꿔놓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이 사건(?)이 아니었다면, 나의 인생은 크게 바뀌어 있었을 것이다.
교내 벤처동아리에서 많게는 8~9 살 적게는 5살 많은 선배형들과 지냈다(심지어 방학에도). 동기들보다 선배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CC 한번 되어보지 못하고 졸업을 했지만, 취업 후 일을 하면서 필요한 지식들을 준비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연합고사(고등학교 입학시험)에서 걱정과는 다르게 넉넉한 점수로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야자'라 불리는 야간자율학습이 있었는데, 밤 10시까지 학교에서 있어야 했다. 도시락을 2개씩 싸서 다녔는데, 오전에 체육수업이 있는 날에는 도시락을 미리 다 까먹고 저녁에는 학교 앞 분식집(충암분식)에서 떡라면을 자주 먹었다.
고3. 학교시험은 잘 보지만, 모의고사는 못보는 전형적인 내신형 수험생이었다. 당연히 서울에 있는 대학교는 원서조차 쓸 형편이 못 되었고, 경기도권에 있는 대학교에 원서를 지원했다.
당시(1999년), 컴퓨터에 심취해 있었기에 전공을 선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당시 용돈을 모아, 헬로우피씨, 하우피씨, 피씨사랑 같은 잡지를 구입해 보곤 했다. 수능을 보고나서 어줍짢게 친구와 알바를 하며 지냈다. 기억에 남는 건 만화책 공장에서 일을 할 때였다. 지금은 아파트촌이된, 일산 쪽이었는데, 겨울철 새벽부터 일을 시작해서 오후 4~5 시 경에 끝났다. 너무 추워서 콧물이 마를 새가 없었고 이후 충농증 수술까지 했으나 차도가 없었다. 어쨋든 결론은 번돈보다 쓴돈이 더 많았다는 얘기.
추첨으로 사는 곳 근처의 중학교를 배정받았다. 이때도 비만은 여전했다. 당시에는 먹기도 많이 먹었지만, 운동도 많이 했다. 중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이 기억에 남는다. 체육과목의 여자 선생님이었다. 별명은 소머즈 라고 불렸을 정도로 카리스마가 대단했다. 어떤 주말에 반아이들과 함께 산에 가서 텐트를 치고 야영한 기억이 난다. 학원보다는 점심시간과 방과 후 운동장에서 농구나 축구를 하며 보냈다. 점심시간이 되면, 미리 약속한 것도 아닌데, 축구 팀이 만들어졌다.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하다.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허리디스크 진단을 받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한쪽 다리가 저리고, 걷기가 불편해진 것이다. 당시로서는 지금처럼 흔한 질병이 아니라, 수술을 하고 재활까지 꽤나 긴 시간이 필요했다. 중학교 3학년 1학기의 대부분을 집과 병원에서 보냈다.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가장 중요한 시기를 놓친 터라, 걱정이 많았다. 담임선생님은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이 힘들 경우를 대비해서 실업계 고등학교에도 원서를 넣자고 하셨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때의 허리디스크가 인생의 변곡점 중에 하나였다.
아마도 2학년 때부터라고 생각이 되는데 살이 찌기 시작한다. 가장 큰 이유라면, 절대적으로 많은 식사량(한끼에 4~5 그릇)과 야식이었다. 특히 뜨거운 밥에 마가린과 간장을 비벼 먹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게 주범이 아닌가 싶다.
살을 빼보려고 수영도 다니고, 본의 아니게 씨름부에 들어가기도 했다. 한번은 보이스카웃을 하고싶어서 신청서까지 받아가지고 왔는데, 어머니의 완강한 반대로 역시 울고불고 했던 적이있다.
공부는 중간 정도. 남들 다 해봤다는 임원(반장/부반장/회장/부회장) 한번 해보지 못했다. 무슨 부장(미화?) 같은 건 해봤던 것 같다.
학생 수가 너무 많아서 오전/오후 반이 있었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1학년 2학기 때, 이사를 갔기 때문에 분명히 기억한다. 당시 전학을 가기가 너무 싫어서 울고불고 했던 기억이 있다.
유치원 이전까지의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지금은 아파트 숲이 되어버린 당시 종로구 행촌동과 홍파동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유치원을 가던 길에 있던 성곽길, 다행히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에어컨이 없던 시절, 여름이면 모든 식구들이 옥상에 올라가 잠을 잤다. 산 아래로 해가 지는 광경을 본 걸 잊을 수 없다.
당연히 기억은 없다. 전해들은 바로는 무려 4.9kg 의 우량아였다는 것. 당시 의술로서 제왕절개가 불가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훗날 출산직 후, 어머니의 사진을 본적이 있는데 말로 표현하기 힘들정도로 힘들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