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다음

평점 ★★★★★
한줄평 누구나 반드시 겪게되지만, 회피하고 싶은 그것에 대해 고민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

죽음에 관한 책들을 근래들어 몇 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기억이 맞다면, 책의 저자들은 심리학자로서 죽음에 대한 마음가짐에 대해 기술했다. 이 책은 죽음에 좀더 구체적인 현실과 실상에 대해 말한다. 이 점이 좋았다.
30대까지는 사실 죽음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었다(생각할 시간이 없었다고 하는게 맞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살아갈 시간보다 살아온 시간이 더 많아진 나이에 접어들자, 언젠가는 맞닥들이게될 죽음에 대해 생각을 하게된다.
책에서도 말하지만, '죽음'에 대해서 학교나 책에서 배운 적이 없다. 뭔가 준비를 해야할 것 같지만, 막막하다. 나의 죽음도 물론이려니와 가족의 죽음을 겪게되면 이또한 마찬가지다.

많은 경험을 해본 것은 아니지만, 장례가 치뤄지는 3일 간 고인을 추억하고 기리는 것으로는 조금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와 함께 있었던 시간들에 비하면 말이다.

책은 저자가 취재(?)를 위해 장례지도사 자격증 반에 등록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실제 교육과 실습 그리고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루에 몇 번씩 보게되는 상조회사를 통한 장례가 어떻게 이뤄지는 지. 죽은 후에도 빈부격차가 벌어지는 현실.
이런 와중에도 나름의 보람을 느끼고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의 인터뷰가 나온다.
책을 읽으면서 가까운 사람들의 장례식 때, 염습을 직접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한다는 의미로 말이다. 저자가 교육을 받았다는 장례지도사 과정을 찾아봐야 겠다.

사회에서 보기에 비정상적인 삶(비혼에 자녀가 없는)을 사는 저자는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과연 나의 장례는 어떻게 치뤄야 할 것인가?'

사실 읽으면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기대했다. 아쉽게도 명확한 답은 얻지 못했다. 현재의 법 제도와 사회 인식 하에서는 풀어야할 것들이 있지만, 언젠가 선진국(북유럽) 수준의 장례가 기본적으로 보장되는 복지제도 안으로 들어오기를 바랄 뿐이다.
그럼에도 책에서 소개하는 나름 바람직한 방향으로 운영되는 조직들이 있어 반가웠다.

- 한겨례두레협동조합 채비(작은 장례 추모식)
- 서울시 착한장례서비스(서울시공단이 운영하는 추모 시설과 서울의료원 장례식장을 연계해 시민들이 저렴한 가격에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한 프로그램이다. 이용료는 600만원 선으로, 서울시의 추정에 따르면 기존 장례 비용의 50퍼센트 수준이다.

이 책을 통해 죽음 이후에 대해 좀더 생각할 수 있고 체감할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이 있고, 저자가 했던 것처럼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몇해 전에 유언장을 썼었는데, 쓰는 것만으로도 쓰기 전과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가 확연히 달라졌음을 체감했었다. 실전 경험을 한다면 아마도 또다른 느낌일 것이다.

기억에 남는 구절

제가 상조회사에서 일할 때, 이런 적이 있어요. 나이가 좀 있는 여자 유족분이었는데, 여자 장례지도사가 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더니 자기랑 같이 입관을 하자고 했어요. 그래서 '이 일 해본 적 있으세요?' 물었더니 없대요. 모르지만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때는 제가 나이도 어리고 해서 속으로 짜증이 많이 났거든요. 잘하는 사람이랑 하면 한 시간 걸릴 걸 두 시간을 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살면서 그분 생각이 계속 나더라고요.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게 멋지다. 상주잖아요. 이 초상의 주인. 장례는 나의 상이지 장례지도사의 상이 아니거든요.

저는 장례의 방식을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장례에 대해 잘 모르고, 다 상조(회사)를 써야 하는 줄 알잖아요. 상조를 써서 맡겨버리면 되는 일이라 생각하고, 그런 경향이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아요.
저는 장례라는 것이 결국 삶의 모습을 반영하는 거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지금의 장례는 국가에서 가정의례준칙을 정하고 그에 맞춰 형식이 갖춰지게 된 것인데. 장례라는 게 누가 기준을 정해줬다고 해서 그거에 맞춰 따라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내 삶이 반영되지 않은 장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염습을 하지 않을 것이다. 수의를 입지 않을 테다. 직장을 원한다. 나무관도 쓰고 싶지 않다. 태워질 거라면 종이관이면 좋겠다. 빈소는 하루만. 빈소 제단엔 생화가 놓이지 않길 바란다(꽃을 뿌리에서 분리할 이유가 없다). 조문객에게 육식을 제공하고 싶지 않다. 일회용품 식기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음식 자체를 제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고운 다기에 차나 와인을 대접하고 싶지만, 설거지는 누가하나? 고민이 든다.
빈소에 오래 머무는 사람도, 소란스러운 말소리도 없었으면 좋겠다. 음악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조문을 오지 않는다고 해도 섭섭해하지 않겠다. 여기까지 오는 시간에 각자 좋아하는 일을 하기를 바란다. 그 사이로 잠깐 내 생각을 해준다면 충분하다. 진심이다. 사실 내 죽음에 관해 듣는다면, 그건 내가 당신을 많이 좋아하거나 당신에게 미안해한다는 것일 테다. 부고를 알리지 않을 생각이다. 여기까지. 이걸 받아줄 상조회사와 장례식장이 있을까.

장례식이란 결국 한 사람의 삶, 특히 정상가족의 삶을 평가하는 최종 시험장이 아닐까? 인생이 시험장이라니. 과연 누가, 누구를 위해 만든 시험장인가. 왜 인생에서 탈락자가 생겨야 하나.
인생이 시험이어선 안되는 이유는 시험에는 답을 채점하는 사람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채점의 기준은 사회의 것이라 그 사회가 인정하는 정상성, 쓸모, 가치, 효율이 점수에 반영된다. 나의 인생에 점수가 매겨진다는 건 많은 문제를 양산한다. 그 문제를 '나로 인해 비롯된 것'으로 여기면 살아가는 일 자체가 곤란해진다.
세상이 정답이라 인정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자신에게 닥쳐올 일을 미리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장례는 결혼이나 돌잔치처럼 피할 수 있는 의례도 아니다. 타인의 장례건 나의 장례건, 장례는 분명 인생에 들이닥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