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20대에 들어서면서 항상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둘러싸였던 것 같다. 지금도 그렇긴하지만, 가장 심했을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때보다는 덜하다고 생각한다. 성격 탓인지, 한국 교육의 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나의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저자의 책을 읽으며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이라는 트위터 계정을 만들고 서비스(?)를 시작하고나서 다양한 사람들이 의뢰를 보내왔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건들을 이 책에 담았다.
'혼자서 가기 어려운 식당에 함께 가기'
'재택근무를 하는 데 집에 와서 일을 제대로 하는지 지켜봐주기'
'이혼서류를 제출하러 함께 가주기'
'아침 6시에 <체육복>이라고 DM 보내주기'
'병문안 와주기'
'고민 들어주기'
실제로 많은 종류의 의뢰가 들어왔다. 비용은 무료이며 왕복 교통비만 받는다. 닉네임 답게 저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저자는 사람들이 왜 대체 이런 의뢰를 해오는지 궁금해한다. 가족이나 친한 친구에는 오히려 털어놓기 어려운 고민들을, 난생 처음보는 그리고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 사람 간의 어느 정도 관계를 유지하기위해서는 비용이 든다. 여기에는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포함되는데, 예를 들어 생일이나 기념일에 선물을 주거나 받게된다면, 일종의 빚을 지게 되는 것이다. 받은 것보다 더 비싼 선물을 줘야 한다는 부담과 스트레스.
나같은 사람이 보기에 저자는 일종의 '무료봉사'를 하는게 아닌가 생각하지만, 절대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그가 받는 것은 교통비나 소정의 수고비 뿐이라서 아이가 있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생활이 어려울 수도 있다. 현재까지는 저축한 것을 쓰고 있다고.
조금 애매하긴 하지만, 들어온 의뢰에 대해 나름의 기준을 세워 승낙하거나 거절한다. 그는 꽤나 많은 팔로워를 가진 나름 유명한 트위터리안이 되었다. 언뜻 볼때 말도 안되는 생각에서 비롯된 그의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은 걸보면 기술이 발전해도 뭔가 채워줄 수 없는 뭔가가 있다는 걸 알게된다.
기억에 남는 문장
어째서 <꿈>이라는 단어에 강요당하는 느낌을 받았는가. 돌이켜 보면 나에게는 말 그자체보다는 꿈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사람에 대한 편견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말 그대로 편견이자 내 개인적 의견인데, 그런 사람은 꿈이라는 게 <타인과 세상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듯 하다. 그게 바로 설교처럼 느껴진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세상 모든 꿈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건 아니다. 나도 누가 당신의 꿈은 무엇이냐고 물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그 자리에서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타인에게 도움이 되려고>가 아니라 내가 그러고 싶기 때문이다. <꿈>이란 건 그 정도로 충분할 텐데, 그런 게 아니라 뭔가 거창한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굳이 비꼬아서 말하자면 남들의 칭찬을 기대하고 저러는 건 아닌지 지레짐작하게 된다.
꿈은 미래에 이루고 싶은 것을 가리키는 경우가 일반적일 테다. 하지만 누가 꿈을 물어서 지금 갑자기 미래를 생각해야 하는 것도 성가시다. 나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다는 꿈>은 현재시점에서 이미 성취되었으며 앞으로도 이 상태를 쭉 이어 나가고 싶다는 의미에서의 <꿈>이다. 온전히 <지금>만 바라봐도 좋을 텐데, 언제부터 미래로 이어지는게 전제가 된 걸까.
갓난아이는 유능할 리가 없으며 스펙은 제로.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부모와 주위 사람들에게 귀여움과 돌봄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다. 그런 아기를 보면서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아기처럼 행동해도 살아갈 수 있다면 좋을텐데>라는 마음이 싹텄다. 어쨋든 아기는 웃을 때는 물론, 화를 낼 때도 울부짖을 때 조차도 귀엽다. 뭔가를 하고 있을 때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도 귀엽다. 동시에 아기는 딱히 남들이 <귀엽다>고 해줬으면 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기 좋을 대로 마음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할 뿐이다. 나는 그로써 세상이 돌아가면 최고라고, 예컨대 나뿐만 아니라 모든사람이 자기 좋을 대로 살아가도 괜찮은 세상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