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북경의 택배기사입니다

평점 ★★★★★
한줄평 일과 자유에 대한 삶의 자세를 생각했다. 읽는 내내 공감하며 본 책 ​

도서관의 신간소개 코너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나서 더 기뼜다. 이런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어서.

몇해 전에 중국 소설 '원청'은 읽었지만, 중국 에세이는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부제가 '일이 내게 가르쳐준 삶의 품위에 대하여' 다.

책을 읽으면서 몇해전에 읽었던 국내 에세이 책인 나의 막노동일지청년 도배사이야기 가 떠올랐다. 나라와 언어, 문화는 달라도 사람사는 건 같다는 생각을 한다.
저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작한 호텔종업원을 시작으로 최근까지 19개의 직업을 가져왔다. 이건 책에 언급된 내용을 기준으로 센 것이고 기간이 짧았던 것까지 합하여 20개가 훨씬 넘지 않을까 싶다.
저자의 나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30~40대이지 않을까?
시골의 평범한 가정에서 나고 자란 그는 상하이 같은 대도시에서부터 중소도시를 옮겨다니며 다양한 일을 한다. 책에서 그의 성격에 대해서 자주 언급되는데, 사람과 접촉하는 것을 피하는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적었다. 그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동료나 상사와의 관계는 원만했으며 놀랍게도(?) 19개의 직업을 가질동안 해고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모두 자신이 사표를 냈다). 이런 면에서 저자는 필시 보통사람은 아닌것 같다.
그의 성격도 놀랍지만, 내가 인상깊게 본 것은 그가 일을 하지 않거나, 시간이 날때 작가들의 책을 읽었다는 점이다. 이책을 쓸 수 있었던 이유도 그가 지속적으로 책을 읽고 글을 썼다는 점일 것이다.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그때 나는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부모님은 착하게 살라고만 가르치셨지, 자신의 이익을 지켜야 한다는 이야기는 한번도 하신 적이 없었다.
그러니 사회에 발을 내디뎠을 때 나는 다른 친구들보다 유치하고 더딜 수 밖에 없었다. 학교에 다닐 때는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회에 나가서 주변 친구들은 달라지기 시작했고, 그런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더 넓고 깊어졌다. 나는 그들처럼 자연스럽게 사회인으로 탈바꿈하지 못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그들이 학생에서 순식간에 성인으로 변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학생일 때부터 몸속에 성인을 감추고 있어서 사회에 들어선 뒤 학생이라는 껍질을 찢어버리고 곧장 성인이 되었던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반면 나는 학생일 때 그냥 뼛속까지 학생이었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손해를 많이보면서 이런 걸 전혀 알려주지 않은 부모님을 점점 원망하게 되었다. 부모님이 가르쳐주신 처세술은 사회에서 전혀 통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야망을 가져야 한다고 격려하는 대신 참고 견디라고만 가르치셨다. 옳지 않은 일은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지만, 모든 사람이 옳지 않은 일을 하는 데다 사회는 그들을 벌주고 나를 칭찬하는게 아니라 그들을 칭찬하고 나를 벌주었다.
당시 정부는 중국 애니메이션 산업을 지원했다. 외국 애니메이션의 방영 시간을 제한하고, 중국 애니메이션에는 보조금을 지원하는 방식이었다. 정부에서 그렇게 파격적인 지원을 하는 것은, 외국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자란 아이들은 외국 가치관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며, 그래서 본토 애니메이션 산업을 육성하려는 것이라고 회사는 설명했다. 본질적으로 이데올로기 싸움이란 의미였다. 나는 그런 해석에 동의할 수 없었다. 내가 본 대다수 외국 애니메이션도 선함, 아름다움, 권선징악 같은 가장 보편적인 가치를 다루고 있었고, 국가 이데올로기는 건드리지도 않았다.
일이라는 게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것이고 개인적 소망을 단념하면서도 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 반대의 삶에서는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고 원하는 것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그게 무엇이든 여기에서는 일단 자유라고 부르겠다.
일할 때 나는 자유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일하지 않는 게 자유라고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지인 중에 '편한'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가끔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부럽다며 참 '자유'로워 보인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 편한 일을 한다고 정말 자유로울까? 자유로운지 여부는 본인만 알 뿐이다.
예를 들어, 그들의 기준에 따르면 우리 아버지의 일은 정말로 자유로웠다. 매일 아침 출근하면 차를 마시며 신문을 읽었고 사무용품을 구매, 관리, 배부하는게 주요 업무였으며 가끔 아무도 보지 않는 홍보 글을 쓰는 정보다 전부였다. 그런데 아버지를 매우 잘 아는 내가 단언컨대 아버지는 한번도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해보신 적이 없었다. 그의 의식에는 자유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자유에 관해 논하면 아버지는 이해하기 어려운 황당한 말만 늘어놓으실 것이다.
내 생각에 자유란 무엇을 누리는가 아니라 무엇을 의식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학교도 거의 다니지 않았고 공부할 기회도 없었던, 외진 농촌에 사는 지식수준 낮은 농민이 있다고 해보자. 그는 매년 24절기의 제약을 받는데도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할 것이다. 농한기에는 친구와 카드놀이를 하고 농번기에는 온종일 일한 뒤 저녁에 귀가해 술을 마시면서 쉬고, 언제 무엇을 하든 본인이 원한 일만 한 것처럼 만족해할 터이다. 반면 지식수준이 높고 생각이 복잡한 사람은 일할 때 자유를 느끼기 힘들다.
내가 말하고 싶은 자유는 고도의 자아의식을 기반으로 추구하는 개인적 갈망과 자아실현이며 타인과 확실히 구분되는 정신이다. 나는 그런 자유를 동경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세상이 더욱 다양하고 다원적으로, 더욱 평등하고 포용적으로, 더욱 풍부하고 다각적으로 변할 수 있다고 믿는다. 유전적 차원에서 환경에 대한 적응은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는 것처럼, 사회 전체의 행복은 사회 구성원의 정신적 다양성에 기반한다.
나는 진리의 추구가 진리의 소유보다 소중하다는 도리스레싱의 말에 동의한다. 자유도 진리와 마찬가지로, 볼 수만 있을 뿐 잡을 수 없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평생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않다. 자유를 추구하는게 자유를 얻는 것보다 중요하며 그것이 모든 사람, 더 나아가 전 세계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유는 이상과 신념처럼 삶의 지렛목이다.
글쓰기 경력을 말하자면, 나는 글쓰기를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거의 3년 동안 매일 책을 읽고 글을 쓴게 글쓰기 경력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이후 나는 일과 글쓰기를 번갈아 반복했다. 일할 때는 글을 쓸 수 없었다. 일이 내 시간의 대부분을 잡아먹었고, 감정까지 압도해 퇴근하면 쉬고 싶을 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나는 글쓰기를 통해 일과 자유의 대립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
제한된 선택과 각박한 현실 속에서 갈수록 나는 평범한 하루의 순간들이, 거창한 인생의 고난과 어려움보다 의미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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